아트소향은 2024년 8월 22일(목)부터 9월 21일(토)까지 한국 전통 채색화 기법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결과 분위기를 보다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내는 서예지(b.1995~), 이나영(b.1986~), 이영지(b.1975~) 작가의 《흔적》을 개최한다.
1990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기획한 《맹인의 기억들, 자화상 그리고 다른 폐허들(Memories of the Blind: The Self-Portrait and Other Ruins)》이라는 전시에 참여한 조제프 브누아 쉬베(Joseph Benoît Suvée)의 <드로잉의 근원(The Invention of the Art of Drawing)>(1791)은 아름답고도 슬픈 그림의 신화적 기원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작품에서 고대 그리스 코린트의 여인 부타데스는 연인과의 이별에 그를 기억하고자 등불에 의해 벽에 그리워진 연인의 그림자를 따라 그린다. 데리다는 전시의 기획 의도를 가장 잘 반영한 이 작품을 통해 예술의 근원이 미학에서 주장하는 지각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점을 드러내려 했다. 그림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여인은 해가 뜨면 전쟁터로 떠나갈 연인을 남기기 위해 그림자를 따라 그리지만 반대로 그를 흔적으로 남기는 동안 그를 볼 수 없다. 그림을 그리는 드로잉의 기원은 결국 ‘눈멂’의 상태로 은유된다. 시각 예술의 창작에 있어서 작가는 그것이 추상이건 구상이건 대상과 작품을 동시에 바라볼 수 없다. 또한 흔적으로 남겨진 그림자는 대상이 ‘현전’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것의 ‘부재’를 암시한다. 작가는 대상과 그림(그림자) 둘 중 하나에 있어서 데리다의 ‘눈먼 자’의 상태가 되며, 그림은 현전과 부재의 끊임없는 반복에 의해 탄생한다. 즉 작가들은 보이는 것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억’을 그리고자 한다.
<흔적>의 서예지, 이나영, 이영지 작가는 연인을 기억하고자 했던 부타데스의 소망처럼 삶에서 상실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 흔적을 남기는 행위를 반복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실의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떠한 가치와 행복도 영원하지 않기에 희로애락이 반복되는 삶에서 절망과 감격의 순간은 아울러 나타난다. 시각적 대상이 아닌 기억의 그림자를, 그 그림자가 아로새긴 흔적을 통해 행복과 상실을 동시에 떠올릴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